오래된 거리가 기억하는 것들

시간이 쌓인 골목에는, 말 없이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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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골목을 걸었을 때, 발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거리 자체가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아서였다. 낡은 목조 건물 외벽, 켜켜이 엉킨 전선, 담장 위로 삐죽 솟은 붉은 벽돌 굴뚝 — 이것들은 장식이 아니라 시간의 흔적이다. 누군가의 겨울이 저 굴뚝을 통해 빠져나갔을 것이고, 누군가의 아침이 저 전선 너머로 밝아왔을 것이다.

골목이 오래됐다는 건, 단순히 건물이 낡았다는 뜻이 아니다. 오래된 거리에는 층이 있다. 새로 칠한 페인트 아래 이전 색이 비치고, 철제 난간 위에는 녹이 꽃처럼 피어 있다. 그 층들을 하나씩 읽다 보면, 이 공간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일상을 품어왔는지 어렴풋이 느껴진다. 역사라고 부르기엔 너무 소박하고, 그냥 풍경이라고 하기엔 너무 묵직한 무언가.

좁은 골목, 전선, 붉은 벽돌 굴뚝이 있는 오래된 거리

굴뚝과 전선이 교차하는 이 골목에서, 시간은 수직으로도 수평으로도 쌓여 있다.

오후 늦게 다시 걸어봤다. 빛의 각도가 달라지면 같은 거리도 다른 표정을 짓는다. 목조 건물의 결이 그늘 속에서 더 선명해지고, 전선의 그림자가 골목 바닥에 가는 선을 긋는다. 시간대에 따라 거리가 스스로 다시 쓰이는 느낌이랄까. 아침의 골목과 저녁의 골목은 같은 장소지만, 전혀 다른 기억을 남긴다.

이런 거리를 걸을 때면, 보존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불편하거나 낡았다는 이유로 지워버리면 편리해지겠지만, 그 편리함 뒤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사라진다. 다락처럼 쓸모가 불분명해 보이는 공간도, 골목처럼 효율과는 거리가 먼 구조도, 그것이 남아 있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시간을 감각할 수 있다. 기억은 반듯한 벽이 아니라, 조금 기울고 조금 낡은 표면에 더 잘 달라붙는 법이다.

거리 끝에서 잠깐 멈춰 섰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었다. 이 골목이 기억하는 것들을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기억의 무게만큼은 발바닥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情)이란 아마 이런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화려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오래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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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과 전선이 교차하는 골목, 시간이 켜켜이 쌓인 오래된 거리의 풍경.